온라인에 만든 할아버지의 공간입니다. 사진과 소전, 추모글. 할아버지에 관한 일화로 채워졌으면 합니다. 나의 소전은 2007년에 작성하셨고, 원래 더 긴 글인데 주변 인물에 대해 평가하신 부분은 여기에 옮기지 않았습니다.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것은 지양합니다. 그 외엔 충실히 쓰신 그대로 옮겨 적었습니다.
나도 남같이 자서전이나 써볼까. 그러나 글 재주도 없고 뛰어나게 잘한 일도 없이 한평생 평탄한 길을 걸어온 내가 자서전이란 것보다 여생이 얼마 안 남아 반성 겸 자손들에게 내 살아온 것을 메모 정도로 알려 볼까 한다.
나는 1926년 한창 무더운 장마철(7월)에 경기도 파주에서 6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나서 6살 무렵 경기도 이천(새실)으로 부모님을 따라 이사 농촌 생활을 했다. 그 때는 도시의 부자가 농촌 농토를 독점(지주)하고 농민들은 거의 다 자기 농토 없이 지주의 땅을 빌려(소작) 1년 내내 피땀흘려 농사지어 반 이상을 지주에게 바친다. 아버지는 이런 땅을 농촌에서 지주 대신 관리하는 일(사음)을 맡아본다. 농민들은 그것(소작)도 못 얻는다던지 하던 소작을 떼버리면 굶어 죽는 수 밖에 없어 사음 보는 아버지를 상전으로 나리라고 부른다.
또한 우리 땅도 많은 이천에서 몇 째 안가는 부자였다. 그래도 나는 그 곳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들판에 나가 쉬지 않고 모도 내고 밭도 매고 집에서는 가마니도 짜고 새끼도 꼬고 농사꾼이었다. 가마니는 군수품으로 일제가 농가마다 책임량을 지정해서 강요했다. 초등학교 5,6학년 2년간은 약 10km 떨어진 이천읍까지 매일 자전거 통학했다.
초등학교 졸업 후 1년간 농사 일하고 1941년 개성경찰서 형사부장 먼 친척인 정운창씨 인연으로 개성 송도중학교에 10여대 1 이란 경쟁을 뚫고 입학했다. 그 당시는 일본식민지로 강압 정치를 받는 세계 2차대전으로 일본이 최후의 발악을 할 때다. 학교 생활이란 수업은 있는 둥 마는 둥 순전히 군대 생활이다. 우선 전투모에 국방색 군복에 배낭 메고 군화에 각반을 치는 완전히 군인과 같고 온종일 교련이나 송악산에 실전 훈련과 또는 근로 봉사로 군시설작업 박연폭포 등으로 군수품으로 쓰는 송탄을 채취하러 다녔고 학교 기숙사 생활도 일거부동 모두 군대 생활이다.
기숙사 공동 식당에서 강냉이 주먹밥 한 개로 배가 고파 참을 수 없어 몰래 식당에 들어가 누룽지 훔쳐 먹다 들켜 밤새도록 기합 받은 일 등 고통이 심했다. 학도병이다 지원병이다 일본군으로 강제로 끌려 간다. 그런 판에 부모님이 결혼을 하면 강제 군 입대를 면할 수 있으니 결혼하라고 방학 때 집에 가니 다음 날 결혼 날이라고 가마를 타란다. 나는 부끄러워 그냥 걸어서 처가집에 갔더니 거기서도 천막을 치고 온 동네가 잔치 분위기다. 첫날 밤을 어떻게 지냈는지 생각도 안난다. 아침에 세수를 하니 어떤 젊은 여자가 수건을 주는 데 나중에 알고 보니 바로 내 아내인 신부였다.
원래 우리집은 황해도 평산 드메산골에서 가난하게 살았다. 아버지는 이조 중기 좌의정까지 하던 송강 12대손으로 3남 중 첫째였는데 충북 진천에 사는 먼 친척 (해부) 현감까지 지낸 부자집으로 양자로 가서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서울 수하동 보통학교 훈도(교사)와 교장을 하다가 신병으로 3년간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고 경기 파주에서 몇 년 간 살다가 내가 6살 무렵 경기도 이천으로 지주의 사음을 맡아 보게 된 모양이다.
우리 조상의 봉제사 관계를 말하자면 아버지 3형제 중 아버지는 양자로 가서 양가 봉제사 하지만 두 동생이 마땅히 생가 봉제사 해야 하는데 두 분 모두 자손 없이 끝나서 그동안 내가 오랫동안 생가 봉제사 했으나 우리 형제 모두 누구 하나 아버지 제사 지낼 사람이 없다.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할 수 없이 내가 몇 년 전부터 부모님 제사를 맡게 됐다. 아마도 내가 세상을 뜬 후에는 봉제사나 산소 관리하는 자손이 있을 것 같지 않고 우리 자손이 제대로 화목 유지할지가 정말 우려된다.
결혼하고 중학교 졸업하고 8.15 해방이 된 것은 1944년 부터 1945년 사이 1년 간도 안되는 거의 동시에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나이 20의 어린 나이에 첫 사회 생활을 하게 되는데 몇 개월 간 처가집에서 동네 공회당에서 동네 애들을 모아 가르치기도 하고 서울로 와서 경성 세무서(현 중부 세무서) 근무 하는데 처조카(용환)가 대학에 가야 한다고 강요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성균관대학 야간부에 입학했다. 그런데 우선 의식주 생활(가정)을 해야겠는데 부모님은 하나 도와주지 않고(바리지도 않았다). 내 스스로 해결하는데 그 당시 초대 서울시장(김형민)이 은사라 부탁하니 서대문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 근무케 되고 집은 내 친구(이석구, 김병태) 네 방 한칸을 빌려 살게 됐다. 정말 젓가락 한짝 도움 받은 게 없이 한 개 한 개 사서 살림을 시작했다. 그 때 (21살) 벌써 용택까지 있어서 부모가 됐다. 그리 하여 낮에는 학교 근무 밤에는 야간 대학 공부하면서 지내는데 처조카(용환)가 나를 초등학교 근무 그만 두고 조선 무선 중학교(지금의 광운 전자 대학)를 근무하게 해주었다. 거의 나와 같은 나이 또래 학생을 가르치는데 정말 떨리고 겁이 나서 혼났다.
그리고 가정 생활이 빈곤에 허덕였다. 전세집은 생각도 못하고 고지대 수도물도 없는 월세집으로 그야말로 판자집 하꼬방집을 임대 사는데 아마도 1년에 열 번은 이사하는데 지금 같이 트럭 등으로 하는 게 아니고 리어카를 빌려 두 내외가 앞 뒤에서 끌고 간다. 그 당시는 빌릴 차도 없고 또한 살림살이 도구도 식기과 이부자리 뿐이다. 수도물도 없이 물장사한테 하루 한 지게 씩 사서 썼다.
이렇게 사는 데 청천벽력으로 6.25가 터졌다. 밤새도록 기관총 따발총 소리, 폭격 소리, 당장 죽을 것 같아 방 안에서 이불 속에서 꼼짝 못하고 있는데 긴 싸이렌 소리와 함께 세상이 조용하다. 날이 환해 간신히 밖에 나가보니 중앙청엔 태극기 대신 인공기가 걸리고 거리마다 인민군과 공산당원이 쏘다니며 탱크가 굉음을 내고 다니며 시신이 여기 저기 땅바닥에 널려 있다. 참으로 끔찍하고 공포의 세상이다. 정부와 군경 모두 남쪽으로 퇴각하고 다들 걸어서 피난을 한다.
우선 당장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어 굶어 죽을 판이라 나는 남들과 같이 퇴계원, 노원 쪽으로 가서 호박과 감자 한 보따리 구해 와서 연명을 하면서 나는 용택(5살)을 업고 아내는 효택(2살)을 업고 그러고 당장 필요한 식기 등을 가지고 이천 처가집으로 걸어서 가는 데 가다 날이 저물면 가던 길바닥에서 밥도 해 먹고 자고 하면서 가는 데 마침 효택이는 온 몸이 새빨갛게 홍역을 하는 걸 길거리에서 비를 함빡 맞혀 업은 채로 죽은 것을 길거리 부근에 파묻고 가는 비참한 일도 겪었다. 또한 북한 의용군으로 끌려가다 도망치기도 했다. 또는 공교롭게 인민군 부대가 내 곁을 지나는 바람에 미군 비행기로부터 기총 사격을 당해 총알이 쏟아져 죽는 건데 요행이 살아 나기도 했다.
이럭저럭 약 1 주 정도 고생 끝에 이천 처가집에 도착해서 수 개월 간 걱정없이 평안히 지낼 수 있게 됐고 이천읍 부모님 집을 가보니 집은 텅텅 비고 반동분자 집이라고 감시해서 들어가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온 세상이 북조선인민공화국이 되버린 것 같더니 국군과 미군이 반격해서 남쪽에서 북상하니 인민군이 퇴각하고 9.28 수복하면서 평양까지 갔다가 중공군 참전으로 다시 1.4 후퇴하므로 나는 국민 방위군에 입대해서 순전히 걸어서 17일 만에 밀양에 도착했다. 발바닥이 터져서 피가 나고 못 먹고 못 자서 그 참상이란 말 할 수 없었다.
내 가족을 비롯 부모형제 모두 사방에 흩어져서 어디 가 있는지 살아 있는지 생사를 모른다. 다시 국국이 북상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몰래 국민 방위군에서 빠져 나와 밀양에서 북쪽으로 또 다시 걸어서 이천읍으로 와 보니 경찰서 근무인 둘째 형님을 만나 가족 소식을 대강 알아 서로 만나게 되었다.
6.25 의 난리로 직장을 생각도 못하고 그야말로 사경을 헤매다가 우리 고향 진천으로 가서 그 당시 충북 학무국장인 친척 정인택에 부탁해서 진천농업중학교에 근무하게 되어 그 후 미원중학교, 충일중학교, 서울공업고등학교, 영등포중학교, 서울여자고등학교, 선린중학교, 강남중학교, 덕수중학교, 용산중학교, 강남여자중학교 등 계속 35년간 교편 생활을 했다.
이렇게 장기간 여러 학교에서 계속 근무하면서 승진 한 번 못하고 만년 교사로 끝난 것은 내가 못난 탓도 있겠지만 나이 40 전부터 폐결핵으로 휴가를 받아 제천 의림지에서 뱀도 먹고 주사(스트랩토마이신)를 지나치게 맞아 쇼크가 발생 귀가 안들리게 돼서 수업도 엉망이고 사회적으로 대화도 못하게 돼서 아예 승진의 희망도 못 갖게 돼서 할 수 없이 그 당시 공로 퇴직이란 제도가 있어서 56세에 공로 퇴직 은퇴하고 말았다. 지금 현재까지도 귀가 안 들려 한 많고 괴로운 세상을 보내고 있다.
내가 한 평생을 오직 교편 생활로 보냈는데 반성을 하면 참된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양심과 사랑의 정신으로 교육을 못해 지금 와서 제자들 보기가 부끄럽다. 그러나 그 당시의 학교는 요새 학교 모양으로 한 학급에 30명 그리고 TV, 에어콘, 선풍기, 실험 기구 등 시설은 꿈도 못 꾸었다. 한 학급에 80명씩 콩나물 교실 그것도 모자라 2부제, 3부제로 편성하고 시설이란 하나도 없고 말이 책걸상이지 요새 고물로도 안 쓴다. 여름에 한 번 교실 수업하면 학생이나 교사는 80명 콩나물 통에서 땀이 흠뻑 나서 찜질방이나 다름 없다. 그리고 학교 운영 경비는 모두 자급자족 학생 부담이다. 학생에게 수업료, 후원회비, 학급비 등 강제 징수 하느라 담임 선생이 학생들을 들들 볶아 짜낸다. 학생 부담금을 안 내면 벌청소, 또는 심하면 정학, 퇴학까지 시킨다. 학생부담금을 잘 걷어 들이는 교사가 유능한 교사고 승진도 빠르다.
이런 판국에 사제의 정을 찾아 볼 수 있을까? 월급도 제대로 안 나와 부잣집 애들을 편애해서 도움을 받는다. 이런 판에 어떻게 자기 이상에 맞는 교육을 할 수 있나. 요새 교육 공무원이 부럽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 집안은 재산도 있고 남부럽지 않게 살았는데 재산도 다 없어지고 남에게 존경도 못 받게 된 것은 어찌한 일인가?
2차 세계대전에 일본이 패망하자 일본의 강압 정치하의 식민지로부터 8.15 해방이 되자 일본에 대한 악감정이 폭발 친일파를 숙청하는 폭동이 일어났다. 우리집은 친일 반민족 행위를 한 적은 없지만 동네 초등학교 일인 교장과 가깝게 지내고 둘째 형님(운한)이 일제 치하 군청에 근무했다는 이유로 친일파로 낙인 찍혀 군중이 우리집으로 몰려 들어 폭행을 하니 온 가족이 일시 다른 곳으로 피해 숨어 버린 적이 있다. 아마도 우리가 지주로서 그 당시 95%이상 농민이 소작을 해서 착취를 당한 것이 원한이 된 것이 근본 원인일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더욱 가운이 기울어져 갔다.
그런데다가 얼마 후 6.25가 터졌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아비규환의 세상이다. 이북의 인민군과 공산당이 쏟아져 들어오고 대한민국은 대통령부터 모조리 남쪽 끝으로 도망을 가버렸다. 그 당시 둘째형님(운한)이 경찰서 사찰과 형사로 간첩, 공산당 등 무수히 잡아 들여 고문을 많이해 원한을 많이 샀다. 그리고 운영, 운호도 경찰관이었다. 그 때 우리는 제일 가는 반동 분자로 숙청 대상이다. 세상이 이렇게 되니 서로 이웃끼리, 아는 사람끼리 인민군에 일러 바쳐 서로 해코지 한다. 인민 재판 등으로 많은 사람이 희생된다. 우리 집안은 잡혔다하면 살아 남지 못할 것이 뻔해 이 곳 저 곳 피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다.
갖은 고통 끝에 휴전이 되어 집으로 돌아 오니 재산은 거의 다 없어지고 사는 집 한 채 있을 줄 알았더니 그 마저 폭격을 맞아 온 데 간 데 없어지고 다행히 방 한 칸만 오뚝 남아 부모님은 거기서 살게 되었다. 그리고 8.15, 6.25 등 난리로 우리 소유 땅도 거의 다 팔아 먹고 더욱이 큰 형님과 둘째 형님이 무슨 사업을 한답시고 실패해서 무일푼의 신세가 되어버렸다. 이런 지경에 부모님을 돌 볼 사람이 없어 내가 교사 박봉에 매월 몇푼씩 부쳐 드리다가 얼마 후에 우리집(대방동)으로 모시게 되었다.
아내는 한평생 낙이나 호강을 받아 보지 못하고 헐벗고 굶주림에 시달려 간 불쌍하기 그지 없는 사람이다. 저세상이 있다면 거기서 남 부럽지 않은 행복한 생활을 하기 바란다. 아내가 고인이 되어 집을 떠나는 날 나는 남몰래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고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이 쏟아진다.
나는 한평생 교육 생활을 하며 80 여 년이란 긴 삶을 걸어왔다. 내가 이 세상에 이거다 하는 보람 있는 일을 못했다. 그러나 한 평생 악한 일을 한 적 없다. 그리고 어디에 기대어 사는 기생충 같은 생활을 안하고 죽으나 사나 독립적 능력으로 살았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운 점이 없다. 남들은 불교다, 예수교다, 종교를 믿지만 나는 안 믿는다. 악한 일만 안하고 마음 편하게 죽으면 그것이 종교라 생각한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죽으면 그만 이지 저 세상이 어디 있고 신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래서 나 죽으면 깨끗하게 화장해서 산 중간의 나무 밑에 1m 정도 파고 백골 가루를 용기에 넣지 말고 그냥 파 묻고 봉분도 없이 표식(1m 정도)이나 하나 세워 놓고 자손들의 추모 장소로 하기 바라고 또한 제사도 꼭 지내지 않아도 된다. 일 평생 세상에 이바지한 일도 없는 자가 죽어서까지 살아 있는 사람 괴롭혀서야 되겠나? 깨끗이 이 세상 왔다 깨끗이 살고 깨끗이 가야지.
2007년 2월 5일~8일 정운홍 씀